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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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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섭리를 기반으로 한 초심자의 행운. 연금술사에 대한 고1 때의 기억은 이렇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먹으면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는 희망찬 계기를 준 책. 그리고 얼마전 읽은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과 에메랄드 판의 내용이 겹처지면서 아마 파울로 코엘료는 비밀을 알고 있는 또 한명의 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을 뭐랄까 나에게 어린왕자 같은 책 같기도 했다. 분명 현실이 아닌 책이지만 현실 같아서 실제로 어린왕자와 사막여우를 본 것처럼 양떼와 보물을 보았으니 말이다. 한가지 더하면 한 번 봤을 때 보다 두 번 봤을 때 확연히 나를 느낌을 받을 수 있었 던 책이라는 공통점은 더욱 더 이 책을 앞으로도 시간의 격을 두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 하나 이 책을 읽고 인상 깊은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마크툽’ 이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엊그제 있었던 일과 굉장히 어떤 연관을 갖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목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할 것이 있어서 저녁에 도서관으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이게 왠일 도서 반납기가 꺼져있었다. 그동안 내가 충대에 다니면서 도서반납기가 내가 원할 때 꺼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그 날 까지 내지 않으면 연체가 되기 때문에 마음이 무척 불편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조금 따져볼 생각을 품고 책을 반납했는데 다행이도 반납일은 오늘 까지였다. 일단 나의 착각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만 품은 생각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다음부터는 내가 피해자가 된 것 같아도 일의 앞뒤 정황을 살펴본다음에 그리고 나서 생각하는 여유를 갖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서 사실 다른 책을 빌릴 생각도 없는 데 왠지 새로운 책이 뭐가 있을까 하고 나서 교양100선에 가봤다. 근데 이게 왠일인지 내가 그동안 일고 싶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상편과 기욤뮈소의 신작 소설이 있지 않은가. 덤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도 같이 빌렸다. 뜻하지 않게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빌릴 수 있게 되니 만약 어제 책을 반납기에 넣었더라면 오늘 내가 이책을 빌릴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빌려갈 수 있게 하기 위한 무언가가 작용했을 것 같다는 누가 들으면 뭐라고 할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그리고 그 순간 마음속으로 아하! 마크툽! 이라고 외쳤다. 왠지 나는 그 상황을 그렇게 밖에 느낄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사실 마크툽이라는 단어를 생활에서 쓰는 경우가 나에게 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고립된 느낌보다는 우연과 인연 그리고 필연에 의해서 세상과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세상의 나의 편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을 읽으면서 아직도 안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인데, 사실 내면의 소리라는 것을 정말로 들을 수 있는 것인지 조차 의문이 생긴다. 내면의 소리가 무엇인지도 조금 헷갈린다. 마음속으로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내면의 소리는 아닐테고. 그렇다면 무엇을 들어야 하는 건가. 마음을 고요히 해봤자 적정만이 들려올 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소리인 정적도 들을 수 있는데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얼마나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면의 소리의 내면의 귀를 열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멍청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금술사를 보면서 내면의 소리를 듣기에 아직 나는 조금 부족한 지도 모르겠다. 사막여우의 인간관계론을 고등학교 때 들어와서야 이해 할 수 있듯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 또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나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연금술사는 그래서 한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 나와 함께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필연적으로 또 연금술사를 읽게 되지 않을까? 그 때는 아마 자연스레 마크툽이라는 말이 흘러나올지도 모르겠다. 책을 두 번 읽으면 안보이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 그 땐 분명히 존재 하지 않았을 것 같은 활자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어쩌면 기억에 남는 문장이 계속해서 밝을 빛 같이 되어 다른 활자를 보게하는데 방해를 준 것 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읽었을 때의 은혜의 섭리와 초심자의 행운은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읽는 도중에 그 단어들로 하여금 약간 흥분이 돼서 사실 책을 휘리릭 읽는 것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요번에는 그 흥분이 조금 고요해진 것 같다. 이미 알아서 그런지 아니면 초심자의 행운을 느끼기에는 더 이상 초심자가 아니어서 그런진 모르겠다. 대신 이번에는 초심자의 행운 다음에 자아의 실현을 위해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하지 위해 필요한 인고의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예전에 읽었을 땐 보이지 않았던 구절이 보인 것이다. 난 깜짝 놀랐다. 초심자의 행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추진력을 부여해 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조심자의 행운은 어디까지나 초심자를 위한 것이었다. 자아의 실현을 위해서는 고난과 역경의 인고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안 순간 갑자기 몸에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초심자의 행운만 믿고 무턱대고 나대다가 죽을 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만 알지 둘을 몰랐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조금 잘하다 싶으면서도 나중에 가면 흐지부지 되고만 이유. 이제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인고의 시간에 대한 대비가 없었으니 목표 성취의 실패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한번더 읽음으로써 깨달은 바가 있으니 초심자의 행운 부스터와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고자 하는 끈기를 가지고 나아가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전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는 기분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내 인생을 황금보다 귀하게 만드는 영혼의 연금술도 마찬가지 아닐까? 비록 초반의 행운이 있어 자신감이 생길지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고배를 마시는 것에 대한 감내가 없다면 자아의 실현은 납의 단계에서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불순물을 만들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황금을 만들기 위한 단계를 벗어나 계속해서 잘못 된 걸음을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한정된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닌지 자꾸만 내 마음은 내가 만든 소음에 어지러워지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비 생산적인 고민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조금 달리해보려 한다. 산티아고도 처음에는 길도 잃기도 했지만 어쨌든 돌아돌아 자아의 실현에 다가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그보다 더 나은 출발선상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의 복이라면 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도 그렇고 나와 비슷한 사람도 그렇고 사실 우리는 돌아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이 태어난 이유 중에 하나가 자아의 실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말이다. 간단히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마크툽!